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문단 편집) === 쇼몽 회담과 라옹 전투 === 하지만 동맹군이라고 사정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동맹군 수뇌부는 또 내부적인 문제에 시달렸는데 러시아군은 1812년부터 전역에 참전하여 매우 지친 상황에다가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도 라인강을 넘으면서 보급 문제와 사기 문제로 매우 지쳤기 때문에 전투 열의가 매우 떨어진 것. 더욱이 프랑스에서의 낯선 지형과 민심 그리고 나폴레옹의 격렬한 저항에 일부 동맹국에서는 강화를 고려하기에 이른다. 나폴레옹이 8일 동안 7번의 대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하는 것을 본 동맹군 수뇌부는 나폴레옹에게 1792년 국경을 수용한다면 전쟁을 끝내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그간의 승리에 매우 고무된 상태였던데다가 조금만 있으면 슈바르첸베르크를 트루아에서 격파할 수 있으리라 믿어 거절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블뤼허와 슈바르첸베르크가 합류하여 10만의 병력을 집결시켰단 소식에 거절을 철회하고 1792년 국경선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며, 다른 한편으론 [[프란츠 2세|장인어른]]을 구워삶아서 강화 떡밥을 뿌렸지만, 이미 나폴레옹에 대한 불신이 깊은 동맹국의 영국 대표 캐슬레이 자작과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의 강력한 반발로 동맹군은 1792년 국경선조차도 철회해 버렸다. 2월 22일 슈바르첸베르크와 블뤼허가 트루아에서 철수하여 랑그르로 철수하는 사이에 숨을 고른 나폴레옹은 직접 트루아로 입성하여 7만 4천의 병력을 긁어 모았다. 그 사이에 동맹군은 다시 전의를 다졌다. 2월 25일 바르쉬르오브 회담과 3월 1일 쇼몽 회담의 결과, 영국은 동맹군이 20년간 전쟁할 비용인 500만 파운드를 제공하겠다고 결정했다.이로 인해 오스트리아와의 단독 강화 떡밥 등은 모두 물건너간 것이 되었다. 그 사이에 블뤼허는 2월 마지막 주에 파리로 진군하기 시작했고 파리의 민심은 공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나폴레옹은 마르몽과 모르티에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블뤼허를 저지할 것을 명령하는 한편 우디노, 마크도날,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켈레르만]], 제라르에겐 슈바르첸베르크를 상대하게 했다. 하지만 2월 27일 바르쉬르오브 전투에서 우디노는 슈바르첸베르크에게 패배했고 블뤼허를 저지한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블뤼허는 나폴레옹의 추격을 벗어나 뷜로가 이끄는 증원군과 합류해서, 10만 대군을 이끌게 되었다. 그 사이에 마크도날은 트루아를 잃고 퇴각했고 빡친 나폴레옹은 3월 7일 크라온에서 고작 4만의 병력으로 블뤼허를 공격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네 원수가 대포가 도착하기도 전에 돌격하는 등의 개삽질 때문에 블뤼허를 격파하는데 실패했다. 양측 모두 5천명 정도의 피해를 입었고 동맹군은 일단 라옹으로 퇴각했다. 나폴레옹은 정보 부족으로 동맹군의 퇴각을 블뤼허의 후위대 격파로 해석하여 3월 9일 라옹으로 가 다시 한번 블뤼허와 싸웠다. 나폴레옹은 마르몽에게 합류할 것을 명령했지만 마르몽의 6군단은 무방비 상태로 전진하다가 요르크의 습격에 개발살났고 나폴레옹은 피같은 병력 4천명을 잃고 마르몽의 합류는 저지되었다. 3월 10일 라옹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병력 열세로 큰 위기에 처했으나 아파서 누워버린 블뤼허의 대리인 그나이제나우가 나폴레옹을 두려워하여 나폴레옹의 병력을 섬멸하는데는 실패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병력 열세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수아송으로 퇴각했는데 그는 이미 6천명의 피해를 입은 후였다. 동맹군의 피해는 2천명에 불과했다. 수적열세도 뼈아팠지만 모든 전선을 나폴레옹이 관리할 수 없다는 문제가 컸다. 그밖에 전선에서도 프랑스 북부전선은 저지대 지역은 몽땅 탈환당해 전선은 릴(Lille)지역까지 밀려났고, 프랑스 동부 국경 수비대는 대불동맹 병력에 관통당해 고립무원 처지에 나폴레옹의 양아들 외젠은 이탈리아에서 고전 중이었으며 남서부에선 술트가 웰링턴에 털리고 있었다. 이쯤되면 이미 프랑스 민심은 나폴레옹에게 돌이킬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나폴레옹의 끊임없는 증세와 징병으로 프랑스 국민들의 삶은 파탄날 지경이었고 나폴레옹을 지지하던 명사들의 아들들까지 그간 대리인을 사서 보낸 것도 아무 보람 없이 닥치는 대로 전쟁에 끌려가고 있었다. 이미 프랑스의 누적 징병 기피자들은 '''100만명을 돌파했고''' 1814년 탈영자만 18만에 달했다. [[루이 18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혁명과 제국에서 처분된 국유재산에 관여하지 않음으로 신질서를 인정하겠다고 선포하여, 부르주아들의 지지를 확보했고 [[부르봉 왕정복고]]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더군나 보르도에선 이미 왕당파들이 도시를 탈환하여 부르봉 왕조의 백합 깃발이 걸리고, 툴루즈도 부르봉 왕조를 지지했다. 심지어 파리에서도 보나파르트 지지파들조차 왕정복고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지경이었다. 사실 나폴레옹이 잘 나가던 1807년 경부터 국사는 내팽겨치고 전쟁광질에만 미쳐서 나라를 파멸로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한 탈레랑과 푸셰가 쿠데타로 뮈라를 황제로 옹립할 음모까지 꾸몄는데 앞서서 끊이지 않는 전쟁으로 경제는 파탄이 나고, 병력을 수십만이나 갈아먹고 기혼자에 나이제한까지 없애가며 무차별 징집과 높은 세금으로 민심은 진작에 떠난 상황이었다. 프랑스 전국에 과부나 아들잃은 부모가 셀 수 없을 지경인데 황제 만세 소리가 나올 리가 있나..... 결국 참다못한 입법원은 나폴레옹의 전쟁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나폴레옹은 격분하여 만약 까불면 프랑스를 자코뱅들에게 넘겨주겠다고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사실 나폴레옹은 대불동맹보다 자코뱅을 더 혐오했으므로 당연히 실제로 그러진 않았다. 나폴레옹은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로베스피에르]]가 그랬던 것처럼 국가총동원령을 선포하고 아주 막나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지방에 남은 자코뱅 세력들의 부활의 단초가 될 것을 우려하여,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무력을 바탕으로 판세를 되돌리려 했다. 그래서 일어난 일이 위의 6일 전역과 블뤼허 추격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